edge of haven
답답한 마음에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서 찾은 집 근처의 바닷가. 삼삼오오 해변가를 찾은 가족들과 친구들의 모습이 보인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잔뜩 마실을 나왔다. 그 무리들 사이에 홀로 나온 사람은 모자가 달린 자켓의 모자를 깊숙히 눌러 쓴 홈리스로 보이는 흑인 남자와 나, 단 둘뿐이었다. 그의 오른쪽 손에는 어느 낚시꾼이 버리고 간 듯한, 바늘과 찌가 어지럽게 감긴 나일론 낚시줄이 들려 있었다. 그것으로 낚시라도 할 요량일까? 낚시줄을 꼬옥 쥔 손은 부르트고 터서 바윗돌 마냥 거칠어 보인다. 그의 힘 없는 발걸음이 내내 눈에 밟힌다. 다리 중간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요즈음 언어도 문화도 잘 통하지 않는 이 곳에서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터였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해서든 오고 싶어하는 나라. 나는 그 나라에 살고 있다. 왜들 이 나라에 그토록 오고 싶어하는 것일까? 내가 이런 신세한탄을 늘어 놓으면 철없는 소리하지 말라고들 한다. 그런가? 많은 이들이 그렇게 오고 싶어하는 이 나라에 직장을 가지고 조금 있으면 영주권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 나라가 너무 싫고, 살기싫다라는 생각은 그저 ‘철없음’일까? 어떤 환상이 이 나라에 살고 싶지않다고 느끼는 내 생각을 ‘철없음’으로 간주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이 미국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맹신하게 하는 것일까? 참으로 설득력 없는 비판일뿐인데, 나는 특별히 회답할 무엇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아니, 긴 역사를 통해 드러난 진실의 공방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가지고 있는 야비한 매커니즘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겉으로만 화려한, 강한 자부심들 그리고 진심을 알 수 없는 웃음. 그래 어쩌면 그 구토에 너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 곳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텨가는 내게 긍정적인 힘을 넣어주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갈수록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이 곳에서의 지난 2년동안 너무 절실히도 느끼고, 체험해왔다. 그러다보니 내 사고의 혈류는 좁아진 동맥을 제대로 순환하지 못하고, 잔뜩 끼어버린 기름띠에 걸려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잦은 어지럼증으로 나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소통의 곤란이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구토증상은 내 스스로 좁아진 사고의 단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던차에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이란의 한 여성 락커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이란은 여성의 사회적인 진출이 어려운 곳이다. 여성이 무대위에 선다는 것 자체가 금지라고 하는 것을 보니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 이상인가보다. 그런 곳에서 그 이란 여성은 홀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 동영상을 통해 나의 ‘철없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젠장. 단, 그들이 내게 일반적으로 던진 논리에 상응하는 ‘철없음’은 아니다. 그래 적어도 내가 처한 상황은 최악이거나 나쁜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구토가 나올지경의 이 사회를 향해 무엇을 도전해보았던가? 그저 팔장끼고 앉아서 팔자좋은 투덜이였을 뿐이다. 철없다 진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환경도, 그러한 시각도 아니다. 그것을 향해 비판하고, 행동하여 그것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래, 이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딪혀는 봐야하는 것 아닌가. 왜 이제서야 이 빌어먹을 생각이 계란 껍질 깨지듯 튀어나온 것인가. 막연한 긍정의 우스운 허깨비가 아닌, 비판의 냉정함을 통해 나를 세웠어야 했다.
견고한 황금옷을 입고 돌아가는 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피해자인 홈리스와, 사회적 불평등한 금기를 깨기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서는 이란 여성 Maral. 그들이 서 있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그리고 천국에도 분명 존재할 가장자리에서 당당히 세상의 중심으로, 천국의 중심으로 나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두손 모아본다. 나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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